| 성슬기: 비가 정말 안 그치네요. 오늘 하루 종일 올 것 같아요. |
| 양유석: 그러게 말이에요. 아침부터 계속 오네요. 빗줄기가 꽤 굵어요. |
| 성슬기: 날씨가 이러니까 손님이 하나도 없어요. 원래 이 시간엔 자리가 꽉 차는데, 오늘은 조용하네요. |
| 양유석: 비 오는 날엔 다들 집에 있고 싶어 하잖아요. 나오기 귀찮으니까요. 저도 사실 집에 있을까 하다가 나왔거든요. |
| 성슬기: 잘 나오셨어요. 덕분에 가게가 덜 심심하네요. 손님도 없는데 저는 기계 청소나 좀 해야겠어요. 이럴 때 아니면 시간이 없거든요. |
| 양유석: 좋은 생각이네요. |
| 성슬기: 커피 더 드릴까요? 따뜻한 걸로 리필해 드릴 수 있어요. |
| 양유석: 아, 아니에요. 괜찮아요. 지금 핸드폰 보느라 정신이 좀 없어서요. 마시던 거 아직 남았어요. |
| 성슬기: 천천히 드세요. |
| 양유석: 네, 감사합니다. |
| 성슬기: 표정이 되게 진지하신데…… 혹시 일하시는 중이세요? 경찰 업무 같은 거요? |
| 양유석: 아, 아니에요! 오늘은 쉬는 날이에요. 일하는 거 아니에요. |
| 성슬기: 아, 다행이네요. 너무 심각해 보이셔서요. |
| 양유석: 사실 어머니가 사진을 보내주셨거든요. 예전 앨범을 정리하다가 스캔하셨나 봐요. 제 어릴 때 사진들이에요. |
| 성슬기: 와, 진짜요? 옛날 사진이요? 저 그런 거 보는 거 되게 좋아해요! 필름 카메라 감성 있잖아요. |
| 양유석: 감성은 있는데…… 내용물이 좀 문제죠. |
| 성슬기: 에이, 설마요. 좀 보여주시면 안 돼요? |
| 양유석: 보여드릴 수는 있는데, 놀라지 마세요. 지금이랑은 많이 달라서요. 제가 예전에는 좀…… 특이했거든요. |
| 성슬기: 특이해 봤자 얼마나 특이하겠어요. 보여주세요, 네? |
| 양유석: 알겠어요. 후회하지 마세요. 자, 이거 보세요. 15년 전이에요. |
| 성슬기: 어머! 세상에. 이게 유석 씨라고요? |
| 양유석: 네, 접니다. 초등학생 때요. |
| 성슬기: 되게 귀여운데…… 표정이 왜 이렇게 심각해요? 무슨 나라 잃은 표정인데요? |
| 양유석: 아버지를 따라 하는 중이었어요. 아버지가 경찰관이셨거든요. 항상 저렇게 엄근진(엄격, 근엄, 진지)한 표정을 짓고 계셨어요. 그래서 저도 남자라면 저래야 한다고 생각했나 봐요. |
| 성슬기: 아, 아버님이 경찰이셨군요! 그래서 유석 씨도 경찰이 되신 거네요? |
| 양유석: 네, 뭐 그런 셈이죠. 아버지는 키도 크시고, 되게 무서우셨어요. 특히 콧수염이 있으셨거든요. |
| 성슬기: 콧수염이요? 잘 어울리셨을 것 같아요. |
| 양유석: 네, 아버지의 트레이드마크였죠. 근데 어느 날 퇴직하시고 나서 갑자기 콧수염을 싹 밀고 오신 거예요. |
| 성슬기: 진짜요? |
| 양유석: 네. 집에 들어오셨는데, 저랑 동생이랑 어머니랑 아무도 못 알아봤어요. "누구세요?"라고 물어봤다니까요. 낯선 아저씨가 들어온 줄 알고요. |
| 성슬기: 와, 너무 웃겨요. 콧수염 하나 없다고 못 알아보다니. 아버님이 좀 서운하셨겠는데요? |
| 양유석: 엄청 서운해하셨죠. 그 뒤로는 다시 기르시더라고요. |
| 성슬기: 가족들이 못 알아보면 안 되니까요. 이 다음 사진은 뭐예요? 산속 같은데…… |
| 양유석: 아, 이거요. 캠핑 갔을 때네요. |
| 성슬기: 캠핑! 저 캠핑 진짜 좋아하는데. 야외에서 텐트 치고 자는 거 너무 낭만적이잖아요. |
| 양유석: 낭만이요? 글쎄요…… 저희 집 캠핑은 낭만이랑은 거리가 멀었어요. 거의 군대 훈련 같았거든요. |
| 성슬기: 훈련이요? 캠핑 가서요? |
| 양유석: 네. 아버지가 워낙 엄하셔서요. 텐트 칠 때도 각을 딱 맞춰야 하고, 셔츠도 바지 안에 단정하게 넣어야 했어요. 산속에서 진흙 묻으면 바로 등산화 닦아야 하고요. |
| 성슬기: 세상에. 놀러 간 거 아니었어요? 피곤했겠는데요. |
| 양유석: 그때는 정말 싫었어요. 친구들은 그냥 막 뛰어노는데 저는 "유석아, 텐트 펙(peg) 각도가 틀렸다!" 이런 소리나 듣고 있었으니까요. |
| 성슬기: 아이고…… 어린 마음에 힘들었겠어요. |
| 양유석: 근데 신기한 게 뭔지 아세요? 지금 제가 경찰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잖아요. |
| 성슬기: 아, 맞다. 교관님이시죠. |
| 양유석: 네. 가르치다 보면 저도 모르게 아버지처럼 행동할 때가 있어요. "복장 단정히!" 이러면서요. 어릴 때 배운 게 무섭더라고요. |
| 성슬기: 원래 보고 자란 게 제일 크다고 하잖아요. 그래도 유석 씨는 학생들한테 친절하실 것 같은데요? |
| 양유석: 아버지보다는 덜 엄격하려고 노력하죠. 하지만 저도 반항기가 있었답니다. 이거 한번 보세요. |
| 성슬기: 반항기요? 어디…… 헐! 대박! |
| 양유석: 네, 놀라실 줄 알았어요. |
| 성슬기: 이거 진짜 유석 씨 맞아요? 머리 색깔이…… 보라색이에요? |
| 양유석: 네. '일렉트릭 바이올렛' 색상이었죠. 귀에는 피어싱도 하고, 옷은 엄청 큰 거 입고요. |
| 성슬기: 와, 지금 단정한 모습이랑 너무 달라요! 상상이 안 가요. 왜 이러셨어요? |
| 양유석: 록 스타가 되고 싶었거든요. 경찰은 죽어도 하기 싫고, 드러머가 돼서 세계를 누비겠다고 했었죠. |
| 성슬기: 드러머요? 잘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하고…… 아버님은 뭐라고 하셨어요? 기절하신 거 아니에요? |
| 양유석: 아버지는 화도 안 내셨어요. 그냥 저를 한참 쳐다보시더니 딱 한마디 하셨죠. "머리가 꼭 포도 같구나." |
| 성슬기: 포도요? 푸하하! |
| 양유석: 네, 포도. 그 말을 너무 진지하게 하셔서 반항할 의욕이 싹 사라지더라고요. |
| 성슬기: 아버님 센스가 대단하시네요. 포도라니. 아, 너무 웃겨요. |
| 양유석: 지금 보면 흑역사지만, 그때는 그게 멋인 줄 알았어요. |
| 성슬기: 귀여우세요. 포도 머리 유석 씨. 더 보여주세요. 또 재밌는 거 없어요? |
| 양유석: 음, 이건 고향 사진이에요. 2010년 쯤인가…… |
| 성슬기: 어? 잠깐만요. 여기 낯이 익은데요? |
| 양유석: 흔한 동네 풍경이라 그럴 거예요. |
| 성슬기: 아니에요, 자세히 봐요. 저기 뒤에 있는 건물, '트리플 아몬드' 아니에요? |
| 양유석: 어? 맞네요. 트리플 아몬드 아파트. 제가 여기서 살았거든요. |
| 성슬기: 대박. 저 건물이 우리 카페 바로 뒤에 있는 그 건물이잖아요! 그리고 여기 1층…… 간판 좀 보세요. '댄스 세탁소'? |
| 양유석: 아, 맞다! 댄스 세탁소! 여기 사장님 성함이 '댄'이었나 그랬을 거예요. 아버지랑 자주 갔었거든요. |
| 성슬기: 세상에. 유석 씨, 그거 아세요? 지금 우리 카페 자리가 바로 옛날 댄스 세탁소 자리예요. |
| 양유석: 정말요? 여기가 거기라고요? 와, 소름 돋네요. 어쩐지…… 들어올 때 구조가 익숙하다 했어요. |
| 성슬기: 신기하네요. 예전에는 드라이클리닝 냄새가 났을 텐데, 지금은 커피 향이 나잖아요. |
| 양유석: 맞아요. 냄새가 완전히 바뀌었죠. 화학 약품 냄새 대신 원두 냄새라니, 훨씬 좋네요. |
| 성슬기: 거리도 많이 변했네요. 사진엔 나무가 별로 없는데 지금은 가로수도 많고 자전거 도로도 생겼잖아요. |
| 양유석: 네, 동네가 많이 좋아졌어요. 사실 저…… 얼마 전에 다시 이 동네로 이사 왔거든요. |
| 성슬기: 진짜요? 어디로요? |
| 양유석: 저기 사진에 있는 '트리플 아몬드 아파트'요. 옛날 추억도 있고 해서 다시 들어갔어요. |
| 성슬기: 헐. 말도 안 돼. 저도 거기 사는데요! |
| 양유석: 네? 슬기 씨도 트리플 아몬드에 사세요? |
| 성슬기: 네! 저 3층 살아요. |
| 양유석: 저도 3층인데요? 302호…… |
| 성슬기: 저는 305호예요! 와, 우리 완전히 이웃사촌이었네요? 근데 왜 한 번도 못 마주쳤죠? |
| 양유석: 제가 새벽에 출근하고 밤늦게 들어와서 그런가 봐요. |
| 성슬기: 아, 저는 카페 오픈하느라 일찍 나오고 오후에 퇴근하거든요. 시간이 완전히 엇갈렸네요. |
| 양유석: 같은 층에 살면서 서로 몰랐다니. 재밌네요. |
| 성슬기: 그 건물 겨울에 히터 소리 엄청 시끄럽지 않아요? '컹컹' 소리 나잖아요. |
| 양유석: 맞아요! 탱크 지나가는 소리 나요. 그리고 창문도 바람 불면 덜덜거리고요. |
| 성슬기: 와, 통하는 게 있네요. 그 소리 때문에 잠을 못 자요, 진짜. |
| 양유석: 이제 그 소리 들리면 슬기 씨 생각날 것 같아요. "아, 저쪽 방에서도 듣고 있겠구나" 하고요. |
| 성슬기: 서로 위로가 되겠네요. |
| 양유석: 이건 어머니랑 여동생이 소풍 갔을 때 사진이에요. 어머니가 우쿨렐레를 연주하고 계시네요. |
| 성슬기: 분위기 너무 좋다. 어머님이 악기를 잘 다루시나 봐요. 유석 씨는 드럼 치고 싶었다고 했잖아요? 음악적인 재능은 어머님한테 물려받으셨나 봐요? |
| 양유석: 재능은 모르겠고…… 손 때문이었어요. 제 손이 좀 크잖아요. 기타나 우쿨렐레 같은 건 줄이 너무 얇아서 손가락이 꼬이더라고요. |
| 성슬기: 아, 손이 진짜 크시네요. 섬세한 악기는 좀 힘들었겠어요. 그래서 드럼? |
| 양유석: 네. 드럼 스틱은 꽉 잡고 두드리면 되니까요. 제 적성에 딱이었죠. |
| 성슬기: 단순하고 확실하네요. 사진들을 보니까 기분이 묘해요. 다들 행복해 보여요. |
| 양유석: 그렇죠. 사진은 좋은 순간만 남기잖아요. 힘들었던 건 다 잊어버리고요. 사실 저 때는 숙제하기 싫어서 울상이었을 수도 있는데, 사진에는 웃는 얼굴만 남았네요. |
| 성슬기: 그래서 사진이 좋은 거겠죠? 예쁜 기억만 필터링해서 보여주니까요. |
| 양유석: 그러네요. 근데 앨범을 보니까 드는 생각이…… 최근엔 제 사진이 하나도 없어요. |
| 성슬기: 정말요? |
| 양유석: 핸드폰 갤러리를 보면 온통 업무 일지, 식단표, 운동 스케줄…… 사람 냄새 나는 사진이 없더라고요. 좀 삭막하게 살았나 싶기도 하고. |
| 성슬기: 에이, 바쁘게 사셔서 그렇죠. 그럼 오늘 하나 남겨요! |
| 양유석: 네? 지금요? |
| 성슬기: 네. 이웃사촌 된 기념으로요. 그리고 비 오는 날 단골손님이랑 찍은 사진, 멋지잖아요. |
| 양유석: 어…… 그럴까요? 좋아요. |
| 성슬기: 자, 여기 커피 머신 앞에서 찍어요. 여기가 조명이 제일 좋아요. |
| 양유석: 이렇게요? |
| 성슬기: 네, 김치~ |
| 성슬기: 오, 잘 나왔어요! 유석 씨 웃는 게 훨씬 자연스러워지셨네요. 아까 그 심각한 표정 어디 갔어요? |
| 양유석: 슬기 씨 덕분에 웃었네요. |
| 성슬기: 다행이에요. |
| 양유석: 사실 서울에 다시 와서 좀 외로울까 걱정했거든요. 교외는 조용하긴 한데 너무 고립된 느낌이어서요. 도시는 사람은 많은데 아는 사람은 없고. |
| 성슬기: 맞아요. 군중 속의 고독, 뭐 그런 거죠. 저도 처음엔 그랬어요. 산에서 살다가 서울 왔을 때 정신없었거든요. |
| 양유석: 산에서 사셨어요? |
| 성슬기: 네, 고향이 강릉인데 산이랑 바다 보면서 컸거든요. 그래서 가끔 답답할 때가 있어요. |
| 양유석: 저도 캠핑 좋아하니까 그 마음 알죠. |
| 성슬기: 그럼 나중에 같이 가요! 남산 쪽에 좋은 데 알거든요. 가서 캠핑도 하고 볼더링도 하고요. |
| 양유석: 볼더링이요? 암벽 등반 같은 건가요? |
| 성슬기: 네, 근데 줄 없이 하는 거예요. 일종의 '몸으로 푸는 퍼즐'이라고 보시면 돼요. 어떻게 올라갈지 머리도 써야 하고 힘도 써야 하거든요. 교관님이시니까 잘하실 것 같은데요? |
| 양유석: 몸으로 푸는 퍼즐이라…… 흥미롭네요. 도전 의식이 생기는데요. |
| 성슬기: 그쵸? 같이 가면 재밌을 거예요. |
| 양유석: 좋아요.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. |
| 성슬기: 조건이요? 뭔데요? |
| 양유석: 캠핑 요리는 제가 하게 해주세요. 불 피우고 고기 굽는 건 제 전문이거든요. 어릴 때 훈련…… 아니, 캠핑으로 다져진 실력을 보여드릴게요. |
| 성슬기: 오, 든든한데요? 그럼 저는 커피를 책임질게요. 산에서 마시는 커피가 또 예술이거든요. |
| 양유석: 완벽한 계획이네요. 벌써 기대되는데요. |
| 성슬기: 아, 손님 오셨다. |
| 양유석: 저도 이제 일어나야겠네요. 은행도 가야 하고 밀린 볼일이 있어서요. |
| 성슬기: 아쉽네요. 비도 오는데 조심히 가세요. |
| 양유석: 네. 오늘 커피 잘 마셨습니다. 사진 얘기도 들어주셔서 감사해요. |
| 성슬기: 별말씀을요. '포도 머리' 유석 씨 덕분에 많이 웃었어요. |
| 양유석: 그건 잊어주세요. 그럼, 나중에 건물에서 뵐게요. 엘리베이터에서 만나면 인사해요. |
| 성슬기: 네! 3층 이웃님, 살펴 가세요!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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